Essay

재미없는 친구도 범사, 감사하라

무사장구 2018. 4. 16. 20:23

나는 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 별반 지식이 없다. 그런데 살다보면 꼭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종종 듣게 되는 성경 구절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8절 “범사에 감사하라.”다. 


데살로니가(Thessalonica, 현재의 그리스 항구도시 데살로니키) 전서는 서기 51년 그리스도교의 사도 바울(Paulus)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박해가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작성한 편지이자 신약성경이다. 첫 번째 편지가 전서, 두 번째 편지가 후서가 되는 것 같다. 뭐 이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범사(凡事)란? 평범한 모든 일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In Everything Give Thanks.”다. 즉, 주어진 모든 일 또는 평범한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다. 감사하는 마음이란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불평하지 않는 겸손이 될 수도 있고, 단순한 인정과 납득이 될 수도 있다. 



응답하라 1988을 보면 쌍문동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이 매일 붙어서 죽고 못 살아도 언젠가 성년이 되면 대학부터 취업 이후의 삶 때문에 제각각 환경과 진로 문제로 떨어지듯. 나 역시 안양에서 나고 줄곧 자라며 한 동네에서 초, 중, 고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과 스무 살 전후로 뿔뿔이 흩어졌다. 


내 친구들의 경우 대부분 타국에 유학을 떠났다. 누구는 북미, 누구는 남미, 누구는 오세아니아, 누구는 북아시아, 누구는 유럽... 다들 그때 당시 한국에서 승부를 보기 어렵단 의식에 사로잡힌 부모의 권유 또는 자의로 유학길에 올랐다. 


나 또한 부모님의 권유로 뉴질랜드 유학을 준비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하필 내 고등학교 시절 IMF 금융위기로 국가경제 전반이 휘청하면서 우리네 삶 속 자영업을 영위하던 나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같았던 무수히 많은 분들께서 무너지셨다. 그 결과 나는 유학길을 포기했고, 그 시절 나와 비슷한 사정으로 유학을 포기한 친구가 몇 있다. 


그때부터 상황이 급변했던 것 같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고, 가족 중 누군가 떠나거나 아프거나 하는 등의 여러 이유로 삶이 점점 고단해졌다. 이때 먼 타국 또는 타지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로부터 이메일과 전화를 받으면 별 시답잖은 얘기인데도 잠시나마 일상의 고단함을 잊고 어린 시절 즐거웠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면 한바탕 폭소로 추억을 상기하게끔 나름 즐거움을 줬다. 


그건 더 나이를 먹고도 비슷했다. 친구들은 내게 종종 연락을 하면 “뭐 재밌는 일 없었어?”라고 묻는다. 근데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도, 맛있는 걸 먹어도 크게 감흥이 없을 나이인 내가 하루하루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무료한 일상 중에 재밌는 일이란 고작 티비에서 예능을 보거나 인스타그램에서 재밌는 짤이나 보는 정도다. 


그래서 “재밌는 일? 글쎄...”라며 뭐라 대답을 못하면 친구들은 천 번, 만 번도 더 반복했던 어린 시절 추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그땐 그랬지.”하며 깔깔거린다. 한때는 “이런 시답잖은 얘기, 지겨운 과거 얘기 왜 그리 반복하나? 안부는 간단히 묻고, 차라리 그 시간에 본업에 정진하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땐 내 삶이 너무나 팍팍했고, 정말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삶에 여유를 찾고 나니까 이해가 되더라. 내 친구들은 그런 방식으로 내 무료한 삶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 위로했던 것이다. 


나는 내 친구들 중에 내 삶이 제일 안 풀린 케이스라고, 내가 제일 못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친구들의 삶에 대해 깊이 알게 될수록 겉보기와 다르게 나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힘들게 살아가는 친구도 몇 있었다. 힘들게 살아가는 그 친구들이 다행히 아직 나처럼 한국에 잔류 중이라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친구들을 찾아가 만나려고 애를 쓴다. 


그럴 때마다 “번거롭게 뭘 여기까지 왔어?”라며 퉁명스럽게 말하는 친구의 한마디에 그 속마음까지 헤아리며 국밥에 술잔을 기울이곤 한다. 자주 보진 못해도 연락은 자주하기에 어제 만났던 것 마냥 특별히 할 말도 없다. 그래도 얼굴 마주하며 밥 먹고 술잔도 부딪히고 너무나도 재미없는 농담도 건네곤 한다. 그 시간이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살면서 어린 나이에 가족이나 친구를 잃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내 마음을 알거다. 내가 지금 왜 이런 얘기를 글로 쓰는지 말이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의 바람과 달리 내 곁을 떠나게 되었을 때, 미리 작별인사를 나눌 시간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의 명은 점칠 수 없는 하늘의 뜻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항상 웃는 얼굴로 만나고 헤어지려고 노력한다. 서로의 마지막 모습을 싸우고 헐뜯고 시기하던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이런 생각이 내 안에 자리 잡는 순간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범사에 감사하자.”라는 말을 되뇐다. 


지금도 어디선가 “아 저 지겨운 새끼. 신나게 놀지도 못하면서 왜 놀자고 하는지, 할 말도 없는데 왜 만나자고 하는지, 좋고 비싼 거 먹을 것도 아니면서 왜 밥 먹자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나 좀 그만 찾았으면 좋겠다.”하며 불평을 쏟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저 “범사에 감사해라.”다. 


네가 너무 익숙해져서 지겨워진 그 친구가 너를 찾는 일도 결국 범사다. 네가 정 거스르고 싶다면 거슬러도 되는 일이지만, 다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쉽게 거스르지 못할 것이다. 그 친구는 그 지겨움 속에서도 너의 일상을 받아들이고, 너를 걱정하고, 너를 위로하고 싶을 뿐이다. 재미를 주는 재주가 없을 뿐. 너를 생각하는 마음은 네 친구들 중에 최고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너를 떠나도 그 친구는 네 곁에 남아줄지 모른다. 그러니 범사에 감사해라. 언젠가는 네가 먼저 보고 싶어서 그 친구를 찾아가도 손 한번 붙잡지 못하고 빛바랜 사진으로만 추억하게 될 날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