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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자퇴생의 희망, 정우성의 동기부여

무사장구 2018. 6. 30. 19:54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당시 재산도 뭣도 없는 월남민과 여러 이재민들은 폐허가 된 땅에 미군이 가져온 각종 자재와 전후 폐기물로 벽을 세우고 그 위에 나무판자(널빤지)로 덮는 방식으로 만든 바락크 집을 각 가정마다 지어서 촌락을 이뤄 살았습니다. 이것을 판자촌 또는 해방촌이라고 합니다. 


1960년대 말에 형성된 서울의 판자촌 2백여 곳 가운데, 이주 정책 및 도시개발로 대부분이 사라지면서 현재는 그 존재를 찾아보기 어려운데, 2018년인 현재까지도 존재하는 강남의 마지막 판자촌은 개포동 구룡마을이, 강북의 마지막 판자촌으로 노원구 중계동 언덕에는 백사마을이 있습니다. 


언덕이 많은 사당동도 과거엔 판자촌이 있었습니다. 역사의 근시안적 철거민 이주정책의 결과로써 중구 양동(지금의 회현동 남대문로5가 일대를 부르던 옛 지명)과 용산구 이촌동 철거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며 새롭게 삶의 터전을 이룬 곳이 사당동이었습니다. 당시 사당동은 10년 만에 그 규모가 약 10배 넘게 증가할 정도로 급속히 팽창되는 지역 중 하나였습니다. 


1980년대 군부독재정권 시기에는 정권의 비정통성을 은폐하고 국민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유독 국제적인 행사를 많이 개최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 등의 행사를 치르면서 이들 대회를 통해 짧은 시간에 고도성장을 이룬 성과를 대외적으로 선전하기 바빴던 정권의 입장에서,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의 판자촌들은 눈에 가시와 같았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존재들이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당시엔 도시환경 정화라는 명목으로 판자촌 주민들은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야 했고 무자비한 철거 앞에 미천한 존재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1980년대 독재정권은 중동의 건설경기에 투자한 인력과 기술을 바탕으로 대대적인 개발 붐에 편승하여 ‘재개발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당시의 재개발방식에는 ‘공영재개발’ 이라고 있었습니다. 공영재개발은 정부가 철거에서부터 아파트의 건설과 분양, 판매의 전 과정을 장악하여 이윤을 남기는 것으로 건설업체는 정부에서 건설부분만 하청을 받았고, 정부가 고시한 가격에 입찰하여 아파트를 건설함으로써 평균이익과 차액을 두둑이 챙기기 바빴습니다. 이때부터 토지의 이용방식이 비자본주의적에서 자본주의적으로 전환되었던 것입니다. 


철거이주민들은 판자촌에 삶의 터전을 닦고 살만한 동네를 만들어 이내 도로가 나고 공공시설이 들어설 정도였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던 버려진 땅이 철거이주민들로 인해 살만한 땅으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경제적 인프라의 형성으로 재산적 가치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정권은 올림픽과 뉴타운(재개발)사업을 내세우며 판자촌의 가난한 이들이 창출한 가치를 송두리째 앗아버렸습니다. 정부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온 공영재개발은 민간건설회사의 분양과 판매를 전담하려는 요구와 대립하였고, 가옥 주와 세입자들의 제대로 된 보상과 주거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자비한 철거로 상당수의 피해자가 속출했습니다. 서민들이 이루고 창출한 토지의 가치를 개발이란 미명 하에 공권력을 휘둘러 착취한 것이죠. 



이런 시대적 상황의 한 가운데, 어린 정우성이 있었습니다. 


정우성은 큰 키에 전형적 미남형 얼굴로 태가 워낙 좋기 때문에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강하여 재벌 3세의 느낌이 강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유년시절 달동네를 전전했던 극 빈곤층 중 한명이었습니다. 


정우성은 과거 2012년 12월 6일 목요일에 방영된 MBC 예능 황금어장 무릎팍(’무르팍‘이 바른 말) 도사에 출연해 사당동 판자촌에 거주하던 시절을 회상했습니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10대 후반이었는데 분명히 옆집이 있었어요. 집과 집사이 벽을 마치 통로처럼 통과해 들어가는 형태의 단칸방에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옆집이 철거되어 벽이 없어진 거예요. 그 벽은 세상으로부터 우리 집 형편을 가려줄 수 있는 유일한 가림막이였는데, 그 벽이 없어지니까 흡사 발가벗겨진 느낌이 들어 기분이 묘하더군요. 마치 온 세상이 우리 집 형편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어요.” 


판자촌은 대부분 지대가 높아 달동네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달동네 주민들은 판자촌 철거가 진행되면 쫓겨나 또 다른 달동네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주거의 불안정함 또는 주거공간의 부재 속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가출, 학교 중퇴, 절도, 교도소, 매춘, 임신, 이혼이란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다 보니 가난은 대물림되기만 했습니다. 그 시절 그토록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던 대부분의 철거이주민들은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미래와 지금의 고난 때문에 희망이란 것을 잃은 채 살아갔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 정우성은 달랐습니다. 


“가난이 자랑거리도 못 되고 불편했지만, 창피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 가난은 아버지의 것이고, 나의 가난은 아니기에 극복해서 다른 나의 삶을 만들겠다고 마음먹었죠.” 


역지사지로 우리가 어린 시절 만약 정우성처럼 사당동 판자촌에서 살고 있었다면 어떠했을까요? 과연 정우성과 같은 생각을 하고, 정우성과 같은 마음을 먹을 수 있었을까요? 어린 정우성의 마인드는 정말 대단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범상치 않았던 소년의 강인한 신념이 지금의 배우 정우성을 있게 한 유일한 근본이자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우성의 학창시절 아르바이트 일화는 자주 회자될 정도로 매우 유명합니다. 


정우성은 동양중학교 3학년(1988년) 재학 당시 여름방학 무렵, 아주 우연한 기회로 서문여중고 근처의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이 인생에 있어 매우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정우성은 남성초등학교 재학시절부터 키가 180cm가 넘었고, 중학교 때는 184cm였을 정도로 유난히 컸다고 합니다. 얼굴이 앳된 것만 빼면, 재수생이라 해도 믿을 수밖에 없던 체구였던 것입니다. 이런 자신의 신체 조건을 이용해서 주인이 나이를 묻는데 “재수생인데요.”라고 넉살 좋게 속였다고 합니다. 당시엔 아르바이트 채용 시 지금처럼 따로 이력서를 받거나 신분증 사본을 의무적으로 요구하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정우성은 아르바이트 채용에 바로 합격되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요즘은 아무리 단순한 아르바이트라도 법규상 신분증 확인이 필수인데다 외식업에 종사할 경우 보건소에서 보건증을 발급받아 제시해야만 해서 나이를 절대 속일 수 없습니다. 정말 그 시절에만 가능했던 이야기인 것이죠. 여담이지만, 미성년자라고 해서 절대 아르바이트를 못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업종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미성년자 고용이 가능한 경우 법규상 미성년자를 보호하기 위해 보호자의 동의서만 있다면 합법적으로 고용할 수 있는데요. 대신 어떤 업종이든 밤 10시 이후로는 미성년자 아르바이트를 근로시킬 수 없습니다. 


당시 정우성이 첫 아르바이트를 했던 멕시칸 햄버거 가게는 방배동에 위치한 서문여자 중·고등학교 앞이고, 지금의 총신대입구역(이수역) 근처 방배현대아파트 인근입니다. 그 당시 서문여중고 앞 골목에는 멕시칸 햄버거 가게가 있었고, 큰 길 쪽에 인디안 햄버거 가게가 있었는데, 인디안 햄버거 가게가 장사가 좀 되는 편이었고, 멕시칸 햄버거 가게는 심각한 수준으로 장사가 안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우성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지 며칠이 지나자 여학생들이 하나 둘씩 가게로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얼마 후부터는 말 그대로 미친 듯이 장사가 잘 되었다고 합니다. 이래서 아르바이트 채용 시 업주 입장에선 준수한 외모를 전혀 안 따질 수 없나봅니다. 그 당시 정우성은 연애편지도 엄청나게 받았고, 정우성을 만나려고 가게에서 화장실 들어가는 골목에까지 여학생들이 몰려있었다고 전해지네요. 그러다 보니 그 주변에 위치한 세화여고, 동덕여고는 물론이고 봉천동에서까지 정우성을 보러오는 여학생들도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렇게 멕시칸 햄버거에 몰려오는 여학생들 교복 종류가 무척 다양해졌고 정우성은 나름 유명세를 탔는데, 기대 이상으로 장사가 잘 되자 주인이 신나서 600원이던 시급을 800원까지 올려 줬고, 보너스로 10만 원씩 받기도 했다고 하네요. 당시 방학이 끝나면서 잠시 그만뒀다가 중3 겨울방학 때 다시 용돈벌이를 위해 일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대단합니다. 



정우성은 돌연 고등학교를 자퇴합니다.​ 


공부에 관심이 없던 정우성은 상고라도 나오면 은행 말단 직원이라도 되겠다는 생각을 품고 종로에 위치한 경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정우성의 권유로 상고에 함께 입학한 정우성의 한 친구가 선배들과 어떤 사건에 엮이면서 정우성은 그 친구에게도 미안하고, 혼자 뭔가 쓸쓸한 느낌도 있고, 학교생활도 막막하고, 아이들도 보기 싫어서 결국 자퇴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를 결심한 정우성은 당시 자신의 선택에 대해 “길이 안 보이더군요.”라고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습니다. 당시 가난으로 불편했던 그의 상황과 진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이며, 자퇴에 대한 결심 후 여름방학이 끝날 때 어머니를 모시고 학교에 가서 자퇴처리를 했다며, 당시 어머니께 너무나 죄송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정우성과 비슷한 중·고교시기에 학교를 자퇴한 연예인들은 의외로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서태지(정현철), 원더걸스 소희와 선미, 빅뱅 승리와 대성, 김현중, 차유람, 신소율 등은 자신의 직업적(연예인 또는 운동)활동에 집중하기 위해서 자퇴한 케이스입니다. 그리고 데프콘, 이하늘, 김창렬 등은 소위 말하는 문제아로 낙인이 찍히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퇴한 케이스입니다. 



학교를 떠난 10대 정우성에게 현실은 늘 배고팠다고 하네요. 일단 배우가 되겠다는 꿈은 있었지만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막연히 모델이 되기로 결심했고, 모델 센터에 교육생으로 들어가 훈련을 받는 와중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틈틈이 방송 3사의 공채 탤런트 시험에 응시했지만, 고교중퇴 학력 때문에 번번이 서류전형에서 탈락했다고 합니다. 



그런 정우성이 방배동 카페골목의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프리랜서로 CF 모델을 찾아나서고, 에이전시를 돌면서 직접 사진을 돌리며 열심히 생활할 때 다시 한 번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옵니다. 



정우성이 압구정동 카페 일할 때 ‘얼굴 잘 생긴 남자애가 일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연예계 쪽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정우성을 보러 찾아왔다고 하네요. 때마침 ‘구미호’란 영화 남자주인공 오디션이 한창이었고, 정우성은 그토록 꿈꾸던 배우로 데뷔하기 위해 절실하고 절박했던 자신의 욕구를 감독님 사무실 바닥을 구르면서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정우성은 1994년 영화 구미호(The Fox With Nine Tails, 1994)의 남자 주인공으로 데뷔하며 당시 인기절정의 신예 고소영과 연기 호흡을 맞추는 기회를 잡게 됩니다. 


첫 배우 데뷔를 그것도 영화의 남자주인공으로 출연했던 것이 당시 그에게는 다소 과분한 행운이기도 했습니다. 발연기라는 악평을 딛고 아스팔트 사나이 등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며 대중의 인지도도 쌓고 그사이 연기를 갈고 닦은 정우성은 3년 뒤 그의 인생작이라 평가받는 비트(Beat, 1997)에서 다시 한 번 고소영과 연기 호흡을 맞추며 최고의 흥행배우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모델을 꿈꾸던 청년이 스타배우가 되는 인생역전을 맛 본 것이죠. 



정우성은 비트 이후 태양은 없다(City Of The Rising Sun, 1998), 내 머리 속의 지우개(A Moment To Remember, 2004),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The Good, The Bad, The Weird, 2008), 호우시절(好雨時節, A Good Rain Knows, 2009), 더 킹(The King, 2016) 등 주옥같은 다수의 명작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그의 독보적인 입지와 정우성이란 브랜드를 확고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재 그의 나이는 만 45세로 어느덧 중년을 넘어 지천명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그가 이번에 김지운 감독의 새 영화 인랑(人狼, 2018)에 출연하며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정우성은 햄버거 가게 아르바이트 당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계기를 가졌고, 압구정 옷가게 아르바이트 당시 자신의 가치를 활용하는 계기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가난을 극복해서 다른 나의 삶을 만들겠다."는 신념이 지금의 정우성을 존재케하였고, 그 결과 자신의 주변으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힘을 얻고 키우는 진귀한 경험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 경험을 통해 지금의 정우성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지요. 



무릎팍도사 출연 당시 "정우성은 자퇴생의 희망"이라고 말한 강호동에게 정우성은 "학교를 그만두고 성공한 사람들이 있지만, 굉장히 찾아보기 힘든 예"라며, "자신이 포기했던 학창시절을 갖고 쉽다."고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정우성이 고교를 중퇴하고 결과적으론 배우로서 성공했지만, 그것은 거저 거머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장점을 활용하는 방법을 택했고, 돈이 아닌 꿈을 좇는 열정이 있었고, 단지 배우가 되고 싶다는 절실하고 절박했던 의지만으로 데뷔 전까지 그토록 모질고 괴로운 시간들을 현명하게 버텨낸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정우성의 실화는 성공의 지름길을 위해 반드시 학교를 중퇴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며,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갈 땐 그만큼 고충이 많이 따른 다는 것을 유념하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소신 있게 밀어붙여야만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들의 가슴에 깊이 남깁니다.